>약 잣이사+케마이사
>맞춤법 맞춘다고 맞춘 건데 틀릴 수도 있습니다 ;ㅁ;
>사망 소재 有
>잣토->이사쿠 <-> 토메사부로
>가독성이 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작업 당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 생명의 이름 들으면서 작업했습니다 (추천)
그 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 해가 밝아오기 전에 함정에 빠져 비명을 지르는 네 목소리가 먼저 울려퍼지던 여느 날의 아침과 달랐다. 불운이 잠시 자리를 비우기라도 한듯 훈련 중에도, 위원회 활동 중에도, 불운에 눌려 울먹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저녁이 다 되도록 이상하리만큼 무탈한 하루를 보낸 네가 이렇게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없다니, 엄청난 불운이 오는 건 아닐까 하며 드물게 불안해 하는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늘 불운하니까 이렇게 불운하지 않는 날도 있는 거 아니겠냐고 달래주었던 게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그 때의 나는 네가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 지 이유를 몰랐기에 그저 종종 내 앞에서만 유약해지던, 또 다른 평소의 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저녁을 먹고 목욕을 마치고 들어간 방은 내가 오기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듯이 한없이 싸늘했다. 후덥지근한 물로 씻고 와선지 꽤 서늘한 바깥바람에도 온 몸에 머무르고 있던 온기가 한순간에 가시는 게 느껴졌다. 차가워진 손끝을 느끼기라도 하듯 거듭 주먹을 쥐었다펴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저녁시간 내내 어딘가 석연치않아 보이던 네 표정, 속이 안 좋은 지 저녁먹은 게 얹힌 것 같다며 보건실에 들렸다 오겠다던 네 말. 씻으러 오지 않는 네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속이 많이 안 좋아 일찍 방에 들어간 것이라 생각하였다. 게다가 오늘은 드물게 불운하지 않은 날이었으니 몸을 씻지 않으면 안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래서 막연히 방에 가면 네가 있으리라 짐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고, 사라진 너는 칸막이 너머 곱게 접혀있는 이불 위에 서찰 하나 남김으로써 자신이 이 야밤에 닌자학교를 몰래 빠져나갔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이불 위에 올려져있는 서찰을 집으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불운 불운 거리긴 해도 역시 실력은 좋은 애다, 입문표에 집착을 보이는 코마츠다 상이 아직 잠들지 않은 시각에, 그가 모르게 닌자학교를 빠져나간 걸 보니. 그래도 서찰을 남기고 나간 걸 보면 무슨 변고가 생긴 건 아니구나 싶어져 안심이 되다가도 펼쳐진 서찰에 빠르고 힘있게 나열되어있는 글자들을 보니 금새 또 불안이 스물스물 치고 올라왔다.
[교장선생님의 지시로 타소가레도키의 전장에 다녀올게, 근처에서 싸움이 벌어져 잠시 상황을 살펴보고 오라고 하신 것뿐이니 늦어도 내일 저녁 전까지는 돌아올거야. 말은 하고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해버려서 급하게 가봐야할 것 같아. 내 걱정은 말고 혹시 위원회 아이들이 날 찾으면 교장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말해줘. 늘 고맙고 부탁할게 토메사부로!]
타소가레도키의 전장에 간다.. 전장에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안했지만, '타소가레도키'의 전장이다. 그렇다면 분명 '그' 또한 있을 터였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이사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는 그이지만, 우리와는 협력관계보단 적대관계에 가까운 자였다. 자신이 모시는 성주의 말이라면 언제든 돌아서서 우리를, 이사쿠를 베어버릴 수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이사쿠라면 그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에게 베일 녀석이었다. 불안함에 손 안에 가득 들어찬 서찰을 힘주어 구겼다. 씻는 게 그리 오래 걸린 건 아니었으니 아직 그렇게 멀리가진 못했을 거다. 쫓아갈까?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밤이면 더더욱 신중히 움직이는 녀석이니 다른 녀석들이 이동하는 속도보다 느릴 것임이 분명했다. 짧은 고민은 곧 결심으로 바뀌었고, 당장이라도 옷을 갈아입으려 장을 열으려던 순간 손에서 부스럭거리며 존재를 알리는 서찰에 다시 한번 눈이 갔다. 남아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내가 따라가버리면 그 녀석이 없는, 그 녀석의 위원회의 작은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늘 밝고 상냥하며, 자기들의 위원장 생각으로 가득차있던 보건위원회의 어린 후배들이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자 장을 잡고 있던 손은 자연스레 떨어져나갔다. 그래, 기다리자. 오히려 여기서 내가 따라가버리면 그 녀석과 달리 명분이 없어 곤란해질 뿐이다. 걱정말고 기다리고 있어달라 말하고 있는 서찰을, 진심을 무시할 순 없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곱게 개어져있는 이부자리를 펼쳤다.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무사히 돌아올거야.
오늘은 드물게 불운하지 않은 날이니까, 괜찮을 거야.
돌아오기로 한 날로부터 정확히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저녁까지 돌아오겠다 말한 약속을 깨고 다다음날 점심이 되도록 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뱃 속 깊은 곳부터 스물스물 올라오던 불안감은 이제 심장부근까지 올라와 몸을 좀먹고 있었다. 불안하다. 그러나 불안하지 않은 척한다. 너를 찾으며 이사쿠 선배는 아직인가요? 하며 걱정스레 묻는 아이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여느 때처럼 호쾌하게 웃어보이며 아마 또 불운때문에 잠시 늦어지는 거겠지, 그 녀석 그게 일상이잖아? 농담조로 애들을 달래고 있자니 란타로가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달싹였다.
"선배도 사실 불안한거죠..?"
속을 들킨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헙,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이 상냥한 아이는 눈치도 빨라서 애써 뒤로 밀어붙이며 숨기던 감정을 발견해낸 모양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고 긍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실인 내가 굳건히 믿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 아이들은 나보다 더한 불안감을 떠안고 걱정에 몸을 떨 것이 눈에 훤했다.
"불안은 무슨~! 이사쿠가 아무리 불운대마왕이라고 불려도 6학년까지 올라온 녀석이라고? 별 일 없을거야, 걱정하지 말고 하던 일 마저 하고 있으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줄테니까"
미심쩍게 쳐다보는 눈초리를 피하며 웃어보이자 아이들은 카즈마의 지도에 따라 보건실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교장선생님께 보고를 마친 후 방에 돌아와있진 않을까, 작은 희망을 가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걸음이 점점 빨라져 익숙한 방 문 앞에 섰을 때는 달리기라도 한듯 숨이 찰 정도였다. 후, 후. 짧은 심호흡 후 긴장된 손으로 문을 열어보지만 역시나 그 곳에는 네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쓴 속을 달래며 뒤돌아나오는데 멀리서 코마츠다 상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앞으로 달려가자 누군가 케마군을 찾는데요~? 하고는 가리킨 방향 끝에 어딘가 떨고있는 몸짓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낯설지 않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모로이즈미 상..?
혹시 하는 마음으로 부르며 천천히 다가가자 돌아서 있던 인영이 똑바로 눈을 맞춰왔다. 아니, 정확히는 쉴새없이 떨리고 있어서 내가 똑바로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했지만. 종종 닌자학교에 오는 걸 보긴 했지만, 우리에게 용무가 있기보다는 도이 선생님에게 용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갑자기 날? 하는 생각과 동시에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손끝이 빠르게 얼어붙었다. 떨고 있는 모로이즈미 상, 타소가레도키, 전장, 그 곳으로 간 이사쿠, 그리고 돌아오지 않은 이사쿠 대신 모로이즈미 상의 손에 들려있는 서찰. 조금씩 몸을 갉아먹던 불안감은 한순간에 온몸을 휩싸았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정도로 큰소리로 쿵쿵 뛰어대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차가워지는 몸뚱이와 달리 등줄기에는 식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설마, 아닐거야. 불안감을 잠재우려는 듯 무의식 중에 주먹을 쥐었다폈다하며 애써 웃어보였다.
"무슨 일로 저를 ㅊ.."
"미안해, 미안해, 젠포우지 군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서찰을 쥔 손을 덜덜 떠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온몸이 삐걱거린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부정하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 니가, 왜? 니가 어째서? 어째서 저들의 손에? 떨려오는 손을 뻗었다. 천천히 내려앉은 무릎 앞으로 서찰이 내밀어졌다. 뻗은 손으로 서찰을 낚아채듯 잡아 펼쳤다. 그리고 필체를 확인한 순간 머릿 속이 하얘지고, 쿵쿵거리던 심장소리가 아득히 멀어져갔다. 네 글씨다, 네가 쓴 글이다. 서찰을 쥔 손에 땀이 들어차는 느낌에 몇번이고 손을 하카마에 비볐다. 무심코 힘이 들어가 서찰을 구겨버리는 일이 없도록 신경써가며 네가 모로이즈미 상을 통해 보내온 글을 읽어내려갔다.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건, 아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다신 너희를 만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겠지? 우선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꼭 다같이 졸업하자고, 누구하나라도 빠지면 졸업에 의미가 없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하게 되어버렸네.. 너희는 상냥하니까 아마 많이 힘들어하고, 또 슬퍼하겠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어려운 일이겠지만, 나는 너희가 나를 잊어줬으면 좋겠어. 나 하나때문에 너희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시대에 태어나 너희와 이렇게 함께 세월을 보낸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내 생각은 잊고 너희의 앞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웠으면 좋겠어. 그동안 정말 너무 고마웠고, 앞으로 잘 지내길 바래
추신. 서찰을 전해준 사람은 아마 나를 죽인 사람이겠지, 그를 너무 원망하지 말아줘. 모든 걸 알고, 받아들인 건 나니까 그에게 화살을 돌리지 말아줘. 내 마지막 부탁이야]
멍한 눈으로 서찰을 몇 번이고 읽었다. 선명하던 글씨가 점점 흐려지더니 이젠 좀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뿌옇게 흩어져보였다. 깜빡. 눈을 한번 감았다 뜨니 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게 볼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없다. 네가 없다. 돌아올 것이라고, 기다려달라고. 그렇게 말했던 네가 이제 없다. 변함없이 상냥한 녀석.. 역시 넌 닌자랑 안 어울린다니까.. 실소와 함께 흘러나온 목소리는 제 것이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허탈하고 공허했다. 가슴 가득 차올랐던 무언가가 한순간에 모두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먹먹하고 터질 것만 같던 감정이 어디로 사라진건지 이상하리만큼 침착해졌다. 눈물 한 방울에 모든 게 흘려보내진 것마냥, 더 이상 내 속에는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손끝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자, 그제야 내 눈 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모로이즈미 상이 눈에 들어왔다.
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공허한 눈을 굴려 모로이즈미 상을 뚫을듯이 쳐다봤다. 시선 끝에 머무는 그의 얼굴은 죄책감으로 얼룩져있었다. 한참을 울음을 토해내던 그에게 나는 모른 척 왜요? 하고 물었다. 이질적인 질문이었지만, 상황을 직시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당신이 왜? 당신이 죽여놓고 왜? 수많은 물음을 가까스로 목 아래로 밀어넣으며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내 질문에 답하려는 지 조금씩 울음이 잦아들던 모로이즈미 상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전쟁이 났어, 닌자학교와 꽤 가까운 거리였으니까 젠포우지 군이 찾아온 게 이상할 것도 없었어. 원래라면 대장을 만나 상황을 전해듣고 돌아가야하는데, 젠포우지 군은 전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어, 마치 치료할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두고 떠나냐는 듯이.. 결국 그는 전장을 떠나지 않고 우리 군사, 적의 군사 가리지 않고 치료를 하기 시작했어. 나나 대장은 말리려고 했지만 듣질 않았지"
"..."
"그러다 그걸 성주님이 알아버리신거야. 적군 아군 가릴 것없이 치료하는 전장의가 있다고. 대장을 조용히 불러 그 전장의를 처리하라고 하셨던 모양이야. 그치만 대장은 그러지 못하셨고.."
"..."
"대장은 되려 젠포우지 군의 곁을 지키며 지켜주려고 했어. 하지만 계속 그러다간 대장이 목숨을 잃게 될 거라고.. 그래서.."
"... 그래서"
".. 독초를 구해 차를 타 젠포우지 군에게 건넸어, 약차니까 먹고 기운내라고.. 대장이 옆에서 지켜주니까 걱정말라고.."
하, 기가 찬다는 웃음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죽이기 위해 독차를 내밀면서, 기운내라고? 지켜주니까 걱정말라고? 움찔거리던 모로이즈미 상은 잠깐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좀전보다 가라앉고 진정된 목소리였지만, 좀전보다 더 작아진 목소리 탓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가까이 기울여야만 했다.
"독이 들어간 차인 걸 이미 알고 있었어, 젠포우지 군은"
".."
"기침을 하고, 피를 토해내고, 뒤틀려가는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뒹굴어가면서도 나한테 그러더라고. 그건 약초가 독초니까, 조심해야한다고. 다음 번에 약초를 구하게 되면 독초인지 아닌 지 꼭 확인해보고 사용하라고.."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도, 이사쿠에 대한 말도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바닥을 응시하며 떨리는 제 양 손을 꾹 맞잡고 있을 뿐. 알고 마셨을 것이다, 이사쿠는. 냄새만으로도 대부분의 약초와 독초를 구별할 줄 아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독차를 모르고 마셨을 리 없다. 아마 제 곁에서 머무르는 그 사람이 이대로 가다간 자기 대신 죽게 생겼으니 자기가 대신 죽겠다 마음 먹은 것이겠지. 바보같은 녀석.. 눈 앞에서 내 눈치를 보는 그를 보자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지금 독차를 들이키기라도 한 듯 속에서 무언가 토해져나올 것만 같았다. 서찰에 강조하듯 꾹 눌러 적혀있던 추신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속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그에게 간절히 말했다. 지금 당장 사라지지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겠다고. 그는 쭈뼛거리다가 곧 숲 속으로 몸을 감췄고, 나는 그제야 뒤돌아 닌자학교를 눈에 담았다.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 지 머릿 속이 아득해져 온다. 나조차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모르겠는데 내가, 내가 이걸 어떻게 전해야하지? 텅 빈 머리 가득 그 날의 너를 떠올렸다. 가장 불운하지 않았던 날, 너는 가장 큰 불운으로 내게 돌아왔다.
그 날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학원이 발칵 뒤집어지고 온 학교 내에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던 나날들. 그 나날동안 우리는 그를 잊기 위해 노력했으며, 각자의 길을 걷기 위해 단련을 마지않았고, 아직 잊지 못했음에도 졸업했다. 성에 소속한 닌자로서 혹은 프리닌으로서 각자의 삶을 바쁘게 살아가면서 사적으로 얼굴을 보기란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그제야 그에 대한 생각이 조금 흐려졌다. 사람인 이상 자기 일이 바쁘고 자기 몸이 힘들면 어떤 괴로운 일이어도 잠시 묻어두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에 대한 미련을 접어두었다. 성주의 명으로 죽임당한 이사쿠를 잊지 못해 어느 성에도 소속되지 않고 프리닌으로 살기도 몇 년, 얼마 전 내가 원망하던 그에게서 타소가레도키 닌자대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게 되었고 나는 그 제의에 답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고 프리닌으로 살기에는 생각보다 생활이 고되었다. 웬만큼 명성이 있지 않는 이상 일도 잘 들어오지 않았고, 그만큼 돈을 벌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아가며 원망하던 그 성주의 밑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꼴이라니, 참 우습네. 숲길을 걸으면서 나 자신의 모습에 조소를 지었다.
부스럭─
타소가레도키 성에 거의 다 도착할 때즈음, 수풀에서 낯선 소리가 남에 바로 자세를 갖추고 품 안의 쿠나이를 힘주어 잡았다. 누구냐.. 속으로 읊으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여차하면 상대의 숨통을 끊을 작정이다, 이 정도야 이미 무덤덤해진 일이었으니.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한번 부스럭 소리가 났다. 꽤 가까운 곳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빠르게 이동하며 머릿 속엔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제의는 거짓이었나, 그 날의 부산물인 나를 제거하기 위해 이제야 나선 것뿐이었나? 그렇다면 나도 참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말았구나, 생각하며 나 자신을 한껏 비웃었다. 이 얼마나 웃긴 꼴인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죽인 성에 스스로 기어들어가 죽임을 당할 위기라니. 터져나오려는 허탈한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부스럭 소리가 났던 수풀의 근처에 도착함에 머리를 두어번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우선 확인이 먼저다, 불확실한 예상은 우선 뒤로 미뤄두자. 조심스레 수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끄응, 하고 어린 아이가 앓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이?
쿠나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아직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왜인지 자연스럽게 행한 행동이었다. 앓는 소리를 따라 수풀을 헤치고 들어갔다. 곧 어딘가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했다, 낯익을 리가 없는데.. 복슬거리며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흩날리는 머리칼, 아이답게 아담한 체구, 밝고 따뜻한 봄을 닮은 머리색. 놀랄 정도로 익숙한 뒷모습에 눈을 의심하며 조심히 아이를 부르자 뒤돌아 눈을 맞춰오는 얼굴에 품 안을 머물던 손이 바닥을 향해 떨궈졌다.
"저기, 혹시 인형 못 보셨나요?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려서.."
울상으로 말을 걸어오는 아이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릴 적의 그를 쏙 빼닮은 모습. 그가 다시 태어났다면 딱 저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은 모습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는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내가 이상하다 생각되었는 지 주저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 아이가 코 앞에 당도할 때까지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본 아이의 얼굴이, 제 볼에 채 지워지지 않은 눈물자국을 달고 걱정스레 나를 응시하는 그 눈빛이 어린 날의 그 자체라고 믿어도 좋을 정도로 닮아있음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깜짝 놀랐는 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이는 조심스레 내 앞머리를 젖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디 아픈 거에요? 아픈 거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성 안으로...
아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나에 의해 끝맺지 못했다. 눈 앞의 아픈 이를 걱정하는 다정함마저, 억지로 지워내려했던 너 그 자체라서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 앞의 아이를 세게 끌어안고 말았다. 당황한건지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몸짓이 느껴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품 안에서 놓아주면 영영 잡을 수 없이 멀어질 것만 같아 그저 강하게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맡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곧 작고 따뜻한 손길이 머리 위를 부드럽게 오갔다. 그 작은 손으로 뒷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아이는 더 이상 몸을 비틀어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음에 나도 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조금 풀었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데리고 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익숙한 목소리가 뒷통수 너머로 들려와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붕대로 칭칭 감싸여진 모습은 내가 졸업하기 전 그 녀석의 옆에서 봤던 그 모습에서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등장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남의 집 귀한 자식이란 말과 어느 새 내 품을 벗어나 그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아빠, 라는 호칭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뭐? 라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래, 그야 당연히 다른 누군가의 자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결혼한 지는 몰랐는데.. 당신, 아이가 있었나?"
"아, 결혼은 안했네. 내 핏줄이 이어진 아이가 아니니 당연히 몰랐겠지"
"그렇다면.."
"버려진 아이네, 부모를 알 수 없던 그 아이처럼"
그 아이, 누구를 지칭하는 지 뚜렷하게 알 수 있는 말에 되려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런 시대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뒤를 잇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러넘기며 그의 한쪽 다리를 껴안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너무나도 닮은 얼굴을 지닌 아이는 자기가 아빠라고 부른 상대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에게 눈을 맞춰왔다.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게 좋을까.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한 상태로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으면, 아이가 아닌, 매달려있는 다리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여기에 있었니? 성 밖은 위험하니까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잖니"
소름이 오소소 돋아날 것 같이 낯선 다정함에 나도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곤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잇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에게는 퍽 익숙한 다정함이었는지, 나와 같이 어색함을 느끼거나 닭살이 돋은 팔을 비비는 모양새는 취하지 않았다.
"응, 그치만 손나몽 형이랑 놀다가 아빠가 준 인형을 잃어버렸는 걸.. 형이 찾아준다고 했는데 바빠보여서 그냥 내가 찾으러 나왔어"
"그랬구나, 그래도 다음 번에는 이렇게 아무 말없이 혼자 나가거나 하면 안돼. 약속하는 거야, 알았지?"
"응.."
"옳지, 착하네. 잃어버린 인형은 아마 손나몽 형이 찾고 있을 테니까 이만 성 안으로 돌아갈까?"
응! 밝아진 얼굴로 고갤 세차게 끄덕인 아이는 자신에게 열리는 품 안에 쏘옥 안겼다. 그대로 들어올려져 그의 목에 팔을 휘감고 어깨에 기대는 모습은 사이좋은 부자의 모습 그 자체였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녀석을 닮지 않았다면 그냥 저 자의 자식이라고 생각했겠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련의 행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자니 '부럽다' 는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쳐갔다. 뭐가 부러운 건지, 왜 부러운 건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막연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저 아이는 그 녀석이 아닌데 말이야...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걸 들은 건지 높은 언덕에 안겨있는 아이가 나를 가리켜보였다. 그 자는 아이의 의지를 따라 성큼 성큼 내게 다가왔고, 어느 새 코 앞에 그 아이가 와 있었다. 그 아인 방긋 웃으며 내게 양팔을 벌려보였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갤 갸웃거리자 그가 제 품에서 내게로 아이를 건네왔다.
".. 뭐 어떡하라는 거지?"
"딱 보면 모르나? 받으라는 거지"
"..."
"형아!"
아이다운 개구진 목소리에 그를 쳐다볼 때 찌푸렸던 미간을 빠르게 풀어냈다. 여전히 내게 양팔을 벌린 채 방긋 웃고 있는 아이, 그 녀석의 어릴 적을 쏙 빼닮은 아이. 생각해보면 나는 그 녀석과 만나고부터, 그 녀석의 부탁이라면 늘 못 이긴 척 들어주었다. 그래, 그런 내가 그 녀석을 닮은 이 아이를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지. 짧은 생각을 마친 후 아이를 따라 웃으며 양팔을 벌려보이자 아이는 더 활짝 웃으며 곧장 내게로 안겨왔다. 목에 둘러지는 작고 말랑한 팔과 볼에 맞닿은 부드러운 아이의 볼의 감촉을 느끼며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좀더 팔에 힘을 주어 단단히 지탱했다. 그 언젠가, 한번도 꺼내놓지 못했지만 늘 속으로 상상했던. 만약 둘중 하나가 여인으로 태어나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면, 꼭 이렇게 너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꿈. 간접적으로나마 그 꿈을 이룬 기분이 들었다. 이 감정을 네게 한번이라도 말해봤다면, 비록 네가 거절하더라도 한번쯤은 말해봤다면. 나는 너를 닮은 아이를 보며 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성으로 온 걸 보니,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걸로 알아들어도 되겠나?"
"맘대로, ...... 니 놈한테 이 아이를 온전히 맡기긴 영 불안해서"
"그래, 그러시겠지"
복면 안으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얄밉게 휘어진 눈은 나를 한번, 아이를 한번. 그리고 나서 성을 향했다.
"새로운 가족이 생겨 그 아이도 기뻐하겠는 걸? 토메사부로군을 꽤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고 말이야."
"누구 멋대로 토메사부로래?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성으로 부르시지?"
"이제 토메사부로 군이 속할 닌자대의 대장인데?"
"윽.."
마음에 안든다는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고 몇걸음 앞서 걸었다. 여전히 품에 안겨있는 아이는 우리 둘의 대화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이해하길 포기한 듯 눈을 감고 몸을 기대어왔다. 자려고? 나즈막히 속삭이자 아이는 작게 웅, 이라고 답하며 곧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었다. 혼자 성을 나와 인형을 찾던 게 퍽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아이가 깨지 않게 묻고 싶은 말을 속으로 눌러담으며 그 자와 함께 성으로 향했다. 이제 함께할 시간이 많을테니, 궁금한 건 가까이서 지켜보며 천천히 물어보면 될 일이다.
이 아이가 이사쿠의 환생인지 아닌지 모른다, 솔직히 아니든 맞든 상관없다
나는 그저 이사쿠를 닮은 이 아이에게, 내 못 다한 진심을 다해줄 생각일 뿐이다.
이게 불운하지 않은 날 널 그렇게 보낸 내, 나만의 속죄라고 여기며─.
"젠포우지 군, 약차야. 계속 쉬지않고 치료했는데 이거라도 마시면서 조금 쉬어, 주변은 대장이 지키고 있으니까"
말을 잇는 모로이즈미 상의 손이 떨리고 있다. 잣토 상의 눈치를 보기라도 하는 듯 근처 나무 위를 훑어보는 시선하며,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그 표정. 모로이즈미 상, 잣토 상이 늘 아직 멀었다고 하시는 게 이해가 안갔는데 이제 좀 알 것 같네요, 아직 졸업도 하지 못한 닌타마한테 이 정도로 속내를 들키면 어떡해요. 살풋 웃음을 지으며 감사인사와 함께 약차를 건네 받았다. 예상은 했지만 향을 맡아보니 꽤 독한 독초였다. 이거라면 마시는 순간 손도 쓰지 못하고 죽게 되겠지.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을 잣토 상을 찾아 잠시 나무들을 훑었다. 이게 내 생의 마지막일 거라는 건 굳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여지는 마지막이었지만 머리와 다르게 몸은 긴장했는 지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이걸 마시면..
닌자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을 위원회의 후배들이 떠올랐다. 내가 없으면 많이 혼란스러워하겠지. 그치만 잘 해낼 거야, 다정하고 상냥한 그 아이들은 보기보다 심지가 굳으니까.
같은 학년의 다른 아이들도 떠올랐다. 함께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를 실컷 미워하고 원망해도 좋으니 나때문에 힘들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동실인 그 애가 떠올랐다. 누구보다 나를 걱정해주고 누구보다 나를 챙겨주는, 늘 날 도와주고 구해주는 구세주같은 사람.
끝내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 건네보고, 이제 얼굴도 보지 못하게 된 사람.
어쩌면 건네지 못한 게 다행일 지도 모르겠다. 사람 좋은 녀석이라 괜한 죄책감을 느꼈을 지도 모르니까
더 이상 필요없을, 짐만 될 이 마음은 내가 가지고 갈게. 너는 너대로의 삶을 살길 바래.
좋아해 토메사부로
속으로 생각을 마치고 손에 들린 차를 들이켰다. 찻잔을 떨구고 손이 떨려왔다. 눈 앞이 흐려지고 기침을 하는 건지, 피를 토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감각만이 정신을 깨우고 있었다. 고통과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 그 사이에서, 내 눈 앞에 떨고 있는 모로이즈미 상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품 안에서 꺼낸, 혹시 몰라 늘 챙겨다니던 유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괜히 내가 사라졌다고 찾아헤매지 않도록, 그 아이에겐 잔인하겠지만 확실하게 나를 끊어낼 수 있도록. 그에게 전달해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꺼져가는 정신을 내려놓았고 홉뜬 눈을 천천히 감았다.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솔직해지는 마음을 마지막까지 숨겼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 닌자학교로 돌아가 아이들과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싶은 마음, 그 애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은 마음... 이 모든 걸 감은 눈 뒤로 숨기고 고통스러운 숨을 점차 멈춰갔다.
─만약에, 만약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그 아이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이뤄지지 않을 마지막 소원을 빌어보며.
죽은 이사쿠가 환생해서 토메사부로나 잣토 앞에 나타난 게 보고싶었을 뿐인데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네
이걸 만화로 그리기엔 무리일 것 같아 글로 쓴건데 글로 쓰길 잘했다.. 이 분량 만화로 절대 못그려..